민족시인 굴원(屈原)과 단오절(端午節)
초나라는 합종책과 연횡론의 최대 희생양이었다. 국가 자체가 거대하고, 모든 국가와 붙어있어서 자칫 실수하면 집단 침략을 당했다. 합종책(合從策)은 야당연대와 같고, 연횡론은 거대여당과 같다.
상앙의 법률지상주의 덕분에 진(秦)은 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동시에 유지할 수 있었다. 가장 변방에 위치한 진(秦)이 중국내에서 G1이 되었다. 그 다음이 초나라였다.
초나라 회왕은 본래 제나라와 친교를 맺었다. 이미 소진(蘇奏)이 완성한 6자회담을 근거로 초와 제가 양자 정상회담을 실시했고, 외부침략시 서로 군대를 파병키로 약조했다.
진나라에서 무왕(武王)이 죽고 소왕(昭王)이 즉위했다. 개업식날 떡을 돌리고, 생일에는 생일잔치를 하듯, 소왕은 즉위식과 함께 주변국 관리에 나섰다. 소왕은 특히 초나라 회왕에게 엄청난 뇌물과 미녀를 선물로 바쳤다. 초나라 회왕은 가만히 있다가 값진 선물을 받고서, 제나라와 교역을 끊어버렸다. 이때부터 진(秦)과 초(楚)의 허니문 밀월이 시작됐다.
배신을 때린 초나라 회왕에게 분통이 터진 제나라는 6자회담 계약 위반을 명분으로 한나라와 위나라에 군대파견을 요청하고, 연합군을 구성해서 전면전을 펼쳤다. 국경이 워낙에 넓은 초나라는 밀물처럼 밀려오는 적군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급히 진(秦)에 구원병을 요청했다.
변덕심한 초나라 회왕의 성격을 이미 간파한 진(秦)은 동맹관계의 담보물로 ‘태자’를 요청했다. 초나라 회왕이 태자를 진(秦)에 보냈고, 중국은 이제 진(秦)과 초(楚)의 세상이 되었다.
제나라와 한나라와 위나라는 진(秦)의 구원병이 파견되자마자 철수했다. 전국칠웅중에서 국방력이 가장 강한 진(秦)과 땅이 가장 넓은 초(楚)가 동맹관계를 체결했으니, 명실상부 G1 G2가 손을 잡은 것이다.
몇 년후 진(秦)에 머물던 초나라 태자가 어떤 장관과 말다툼을 하다가 칼로 살인하고, 도망쳐버렸다. 진(秦)과 초(楚)의 밀월은 이것으로 끝났다. 진(秦)은 즉시 외교채널을 돌려서, 제나라와 한나라와 위나라로 구성된 연합군을 구성했다.
동시다발적으로 밀려오는 진-위-한-제의 연합군에게 파죽지세로 밀려난 초나라는 벼랑 끝에 몰렸다. 할 수 없이 초나라는 제나라에 태자를 보내서 수교를 맺고 잠시 휴전했다. 진(秦)도 이듬해 평화협상 제안을 해왔다. 초나라 회왕은 진(秦)과 정상회담을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친제파인 굴원(屈原)에 물어보니, 가서는 안된다는 답변이 나왔고, 친진파인 자란에게 물어보니 가야한다는 답변이 나왔다. 둘 모두 그 이유가 타당했다.
초회왕 曰, “내가 진나라에 가는 것이 좋으냐? 안 가는 것이 좋으냐?”
굴원 曰, “호랑이같은 진나라입니다. 그 속에 무엇을 숨겼을지 알 수가 없습니다. 평화조약은 함정일 확률이 높으니 가서는 안됩니다.”
자란 曰, “국방력이 강력한 진(秦)에서 먼저 손을 내밀었는데, 그 손을 뿌리치면 계속 전쟁의 희생양이 될 것입니다. 반드시 가야합니다.”
자란의 말을 믿고서, 초나라 회왕은 평화협약을 체결하려고 진(秦)의 국경을 넘었다. 그때 진(秦)은 초회왕을 붙잡아 버렸다. 금중과 무(巫)의 땅을 내놓으면 풀어주겠다고 협박한다. 초회왕은 절대로 내놓을 수 없다고 거절한다.
초나라 정부는 비상상황에 빠졌다. 초회왕은 진(秦)에 붙잡혔고, 태자는 제나라에 볼모로 잡혀있으니, 초나라는 졸지에 주인없는 국가가 되버렸다.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제나라 정부에 ‘초회왕이 죽었다’는 혀위정보를 통보하고, 태자가 귀국하도록 했다. 이 태자가 경양왕으로 등극하자, 진(秦)에 붙잡힌 초회왕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초회왕은 잘못된 선택 한번으로 망향의 한(恨)을 품고서 타국에서 죽고 말았다.
굴원(屈原)은 충신이다. 굴비(屈非)가 비굴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듯, 굴원(屈原)은 ‘근원을 향하겠다’는 뜻이 담겨있다. 뇌물을 받고서 말을 굽게 말하는 간신배와 아첨꾼들로 초나라 조정이 부패하자, 굴원은 ‘이소’(離騷)라는 장편 시(詩)로서 정치인들을 질타했다.
경양왕 19년, 초나라는 비로소 진(秦)과 친교를 끊고, 제-한-위-초로 구성된 4자 동맹을 체결하려고 했다. 체결직전 진(秦)에서 눈치를 채고서, 전면전이 펼쳐진다. 진(秦)은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진(秦)의 압승으로 끝났고, 제나라는 요충지를 모두 잃었다. 이 소식을 접한 굴원(屈原)은 머리를 깨끗이 감고서 ‘애영과 회사의 시’를 남긴 다음에 커다란 돌을 가슴에 품고서 멱라수 강물에 투신자살했다. 거룩한 순국이었다. 굴원의 나이 62세, 이날 날짜는 5월 5일이다.
훗날 초나라는 굴원의 제삿날을 국경일로 지정하고, 굴원의 마지막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청포에 머리를 감고, 물고기에게 밥을 주는 송편을 만들고, 지인들과 관계를 더욱 깨끗하게 정리하는 날로 지정했다. 단오날에 머리를 감는 이유는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가 있다.
단오날의 단오(端午)에서 끝 단(端)은 바르게 할 단(端)으로도 사용된다. 단오날은 바르게 하는 날이며, 午는 五를 뜻한다. 端은 丹과 발음이 같다. 굴원의 나라사랑을 丹에 비유한 것일 수도 있다. 단오날은 머리감기를 통해서 자신의 잘못과 과오를 반성하면서 자신을 보다 새롭게 하는 날이다.
초(楚)는 가장 큰 땅을 가진 나라였고, 경제력이 상당히 풍부한 살기좋은 나라였는데, 초라한 국가로 전락한 이유는 상대파악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다. 수교를 맺어야할 자와 절교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진(秦)과 수교를 맺으면서 국제사회에서 엄청난 손실을 겪었다. 만약 초나라가 1번 실수했다면 아무 상관이 없다. 수십번, 수십년동안 같은 실수를 반복하자, 결국 초나라는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고, 굴원은 이러한 국가의 운명을 한탄하면서 청포에 머리를 감고서 투신자살로서 경종을 울린 것이다. 사람도 반복된 실수를 계속 한다면, 초나라의 운명과 별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단오(端午)는 반성(反省)을 의미한다. 자신의 하루 삶을 가만히 돌아보면서 잘못한 일이 있다면 그것을 깊게 뉘우치고서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성격과 인식관을 고친다면, 훗날 미래사회에서 지도자로 활동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 그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