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글쓰기에 대한 자유로운 설명이다. 형식없이 그냥 쓴 것이다. 도움이 되면 좋겠다. 틀없이 창문밖으로 생각을 던지면, 글은 써지는 것이다. 내 집에 여러 책들이 있는데, 10권 정도를 순서없이 펼쳐놓고서, 보면서 내 머리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은 글이다. 나는 1천권의 책을 집필했다. 49세 나이로 살다보니, 내 자신을 새롭게 깨우지 않으면 생각이 녹이 슨다. 옛날처럼 불꽃을 튀지 못하고, 점점점 식물이 되어가는 그런 느낌? 뿌리가 깊어지는 것은 전통의 형식에 갇혀서 감옥생활을 한다. 곧, 창의성 말살이다. 식민지 치하는 뇌속에서도 일어난다. 조심해야한다. 그래서 이 글은 내가 나를 깨우기 위해서 썼다. 방금도, 내가 존경하는 다문화 교수님과 전화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자신의 삶에 열정을 갖고 사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목소리를 들어보면, 사람의 마음과 그 정직함이 항상 느껴진다. 만날 때부터, 4~5년이 지났지만, 변함없는 열정이다. 사람은 좋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 에너지가 서로에게 충전된다.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에서도 그런 내용이 나온다.)
극예술이 무엇인가? 시나리오는 무엇인가? 대뜸,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내가 지금 다른 책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이 그런 방식이다. 채널을 돌리는 것은 내가 다른 책을 보면서 그 내용을 적는 것이다. 글은 이렇게 쓰는 것이다. 사람이 식당에 가면 식당메뉴가 나온다. 그렇게 생각이 각각 달라진다. 뭔가를 들으면 그 소리에 사람은 반응한다. 반응하지 못하면 죽은 것이다. 죽지 않으려면 날마다 그 감각이 깨어나도록 자신을 훈련하고, 그 방면으로 계속 뭔가를 자극해야한다. 그것이 지혜다. 사람과 대화를 나누거나, 책을 통해서 대화를 스스로 유도하거나, 그렇게 자기훈련을 하는 사람은 뇌가 생동감이 넘친다. 드라마는 아무 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이다. 내게 그렇다. 나는 드라마를 보면서,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한다. 지금 하고 있는 대부분의 드라마를 섭렵하고 있다. 오늘은 청춘기록과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할 것인데, 세종사이버대 중간고사 시험기간이라서 자중하고 있을 뿐이다. 드라마에서는 주인공이 추락한다. 추락하지 않는 주인공은 재미가 없다. 추락과 관련해서 창세기에 아담도 추락했다. 먼저 여자가 추락했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했던 그것을 하와가 했고, 다음에 아담이 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어떻게 구출할지 고민하게 된다. 하나님의 에덴동산에 갈등이 발생했다. 드라마는 창세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추락, 그리고 균형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드라마는 무엇이다”라고 한 줄로 정의를 내릴 수 있어야 한다. 한줄 정의는 글쓰는 훈련에 매우 유익하다. “작가는 무엇이다” “사람은 무엇이다” “남자는 무엇이다” 등등 한줄 정의를 스스로 내릴 수 있다면 그 분야에 대한 깊이를 갖게 된다. 이야기는 단어와 문장을 서술함에 있어서 어떻게 보여지게 쓰느냐의 문제다. 여기에는 문장과 문장으로 결합된 단락의 배치가 중요하다. 사건과 사건으로 결합된 내용들을 서로 어떻게 짜임새있게 배치할 것인가, 그것은 플롯이다. 시나리오는 보여지는 글이라고 한다. 글을 쓸 때, 그림으로 그려지도록 써야한다. (글쓰기 전략에 대해 쓰는 이런 글은 시나리오 형식은 아니다.) 보여지게 글을 쓰는 훈련이 필요하다.
방송은 무엇인가? 방송의 개념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 1인 미디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방송의 본질을 모른다는 것은 바다속에 살면서 바다를 모르는 물고기와 같다. 서울에 살면, 최소한 서울의 역사와 현재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서울의 문화는 사람에게 절대적이다. 물론, 몰라도 살아갈 수 있지만, 알아야 최소한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방송은 매스미디어로서 4가지 사회적 기능을 갖는다. 이런 개념을 파악해야 방송작가로서 글쓰는 법을 익힐 수 있다. 홍학이 홍학을 물어뜯는 사진이 있다. 그 사진을 보면 매우 끔찍하다. 머리위로 피가 흐르기때문이다. 그러나, 홍학의 부부는 남편도 아내도 젖을 낸다. 남편 홍학이 아내 홍학의 머리 위로 붉은 젖을 뿌려주면, 아내 혹학이 자식 홍학에게 젖을 준다. 젖은 어미 홍학만 줄 수 있기 때문에 남편 홍학은 직접 자식에게 줄 수 없다. 그런 모습을 보여줄 때, 자녀 홍학을 보여주지 않고 피가 흘리는 두 홍학 사진만 보여준다면, 잔인한 홍학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 글쓰기의 양심은 여기에 있다.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그것은 선택과 단절의 문제다.
왜, 우리는 어떤 주제를 따라 글을 읽는가? 또한 그렇게 글을 써야 하는가? 이 글은 단락이 나뉘어질 때마다 주제가 바뀐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내가 보는 책이 달라지기때문이다. 쭉 쓰다가 나는 다른 책을 꺼내서 거기에 적힌 내용을 분석하고, 이 글을 이어가고 있다. 물론, 내가 그 책을 그대로 인용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인용하면 저작권법에 걸리기때문이다. 소화를 해서, 내 글에 적용할 뿐이다. 창작은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어디에도 없는 그 무엇을 만드는 것이 창작이다. 그러므로, 창작은 창조의 기쁨이 있다. 창세기 1장에서도 하나님은 새로운 피조물을 만드시고, 1주일 내도록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기쁨이 충만했다.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세계에서 창조의 기쁨을 누리면서 살도록 허락받았다. 하나님의 성령을 믿고, 마음속에 성경말씀을 따라 양심을 지키면서, 자유로운 숨결을 느끼면서 살면 된다. 글도, 자유의 숨결이다. 어떤 글쓰기가 좋은 글쓰기일까?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모호한 의미보다는 그 뜻을 명확히 표현해야한다. “내가 각 단락마다 다른 책을 보면서 내가 느낀 것을 쓰고 있다”라고 말해주듯, 그 뜻이 정확해야한다. 내가 만약 “감자”를 쓴다면, 감자가 어떻게 생겼고, 어디에 놓여있고, 그 감자가 삶은 것인지, 생김새는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적어야 한다.
상상력이 말살되면, 무엇을 해도 따분하다. 자신의 내면이 사막처럼 죽거나, 또는 상상력이 죽은 사람에게 감염되거나,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창조성이 사라진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지혜를 따라가다가 하나님의 창조성을 잃어버렸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주셨다. 하나님의 DNA는 곧 창조성이며, 자유다. 자유로운 상상력을 스스로 할 수 없다면, 새의 날개가 꺽인 것이다. 날마다 사는 재미가 없다면, 그것은 무슨 낙이 있던가? 녹음기를 틀듯, 어제의 연장선을 그대로 사는 오늘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던가? 동일한 내용을 서술하는 사람들의 틈바구니를 벗어나라. 피라미드의 경쟁사회를 벗어나면, 홍해를 건너서 새로운 광야에서 하나님의 바람을 만날 것이다. 그곳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공포가 있지만, 더불어 자신의 인생에 새로움을 가져온다. 인생은 그렇게 변화무쌍하다. 동굴에서 나오면, 정말로 엉뚱하고, 자신의 계획이 틀어지면서 새로운 계획이 창조된다.
소설쓰기를 과연 배울 수 있을까? 물론이다. 흔히 소설은 천부적 재능을 타고나야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의 탄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동물은 걷지 못한다. 사람은 타고나서 걷는가? 아니다. 타고난 것도 있지만 노력해서 그렇다. 배우지 않으면 한글을 쓸 수 없다. 그처럼 소설도 배워야한다. 영감과 재능의 산물이면서, 훈련에 의한 기술이다. 뮤즈의 여신을 기다리지 않아도, 모기를 보면서도 자유로운 상상력이 펼쳐지면서 글이 이어진다. 예술의 어원은 Art인데, Ars가 어원이다. 숙련된 솜씨라는 뜻이다. 재능보다는 시간과 노력과 열정에 의해 다듬어지는 기술을 뜻한다. 작가는 그래서 가내수공업자이며, 창조적 장인다. 책상에 앉아서 펜을 들고, 대장장이처럼 글을 때린다. 생각속에 울려퍼지는 자신의 고통을 글로 흔적을 남긴다. 그게 작가다. 작품의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서 날마다 자신을 깨뜨리고, 슬퍼하고, 생각의 비틀고, 뒤집고, 넘어지고, 그렇게 생각나는 단어들과 문장들이 도자기의 문양으로 새겨진다. 글은 자신이 잘 쓰는 방식으로 계속 써야한다. 운동하는 것과 같다. 좋아하는 그것으로 훈련하는 것이다. 말과 글은 전혀 다르다. 말은 말하면 그 기술도 늘어난다. 글도 마찬가지다. 글을 잘 쓰고 말도 잘하는 사람이 있다. 반면, 말을 잘하지만 글을 못쓰는 사람도 있다. 글을 잘쓰는 사람은 대부분 말도 잘한다. 글이 더 어렵다. 마음에 담긴 그대로 표현하면 진정성이 있다고 사람들은 보통 생각한다. 아니다. 진정성있는 글은 진정성있게 보이도록 쓰는 것이다. 어떻게 쓸 것인가? 그것은 전략적 표현법이다. 글쓰기 전략에는 규칙이 있다. 그 규칙을 알면, 이제 규칙을 깰 수 있다. 규칙을 모르면, 규칙을 깰 수 없다. 횡단보도를 무단횡단하려면, 횡단보도에 있는 신호등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한다. 신호등을 모르면 무단횡단이 뭔지도 모른다. 규칙은 알 때, 깬다. 규칙은 오랫동안 전해진 작가들의 노하우인데, 그것을 따라하면서 글을 쓸 수도 있고, 그러한 틀을 벗어나서 쓸 수도 있다. 지금 내가 사용하는 이 글쓰기는 “생각의 틀을 벗어난 자유로운 글쓰기 방법”을 차용해서 내 방식으로 글쓰기 훈련을 하는 것이다.
글쓰기에서 중요한 것은 갈등이다. 갈등(葛藤)은 칡과 등나무다. 둘은 사는 방식이 다르다. 소설에서는 인물이 갈등을 일으킨다. 작가는 서로 다른 두 인물을 창조해서 반드시 만나게 해야한다. 현실세계에서는 서로 문제가 부딪히는 인물들이 만나지 않고 피해다닌다. 마치 자색옷을 입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만나지 않듯이 그렇다. 소설에서는 그런 두 인물이 만난다. 자색옷을 입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소설로 각색된다면, 부자가 대문을 열어서 거지 나사로와 만난다. 만나서 무엇을 하든지 해야한다. 또는 거지 나사로가 대문의 문턱을 넘으려고 했는데 넘을 수 없어서, 망치를 가지고 와서 대문을 깨버린다. 혹은, 개들이 부자의 자녀들과 함께 거지 나사로에게 오는 방법도 있다. 어떤 방법이든, 둘은 만나야 한다. 이런 갈등은 중풍병자를 4명의 친구가 데리고서, 주님이 설교를 하던 베드로의 집 지붕을 뜯어서, 기와를 들어내서 공중에서 내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게 두 인물이 만나는 것이다. 갈등이 없다면 변화가 없다. 지금 있는 그대로를 유지하길 원한다면 막는 사람이 없겠지만, 가속도가 없는 것은 ‘속도변화’가 없으므로 죽은 것이다. 새로운 변화는 갈등의 침략이다. 갈등은 나쁜 개념으로 정의되지 않고, 변화를 주는 생명력이다. 갈등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갈등은 차이로서 반드시 존재한다. 이 갈등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고, 처리할 것인가? 갈등에 대한 사용법이 중요하다. 만약, 갈등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규정하면, “변화를 위한” 새로운 갈등이 표출될 때마다 그 조직은 갈등을 향해 “쓰레기”로 해석할 것이다. 갈등은 “지금의 고정된 틀”을 새롭게 변화시키려는 운명적 신호다.
성경을 보면서 글쓰는 훈련을 할 수 있다. 옛날에, 빌립 집사는 에티오피아 재무부 장관을 전도했다. 그는 이사야 글을 읽고 내려가는 내시에게 가서, “읽는 것이 이해가 되냐”고 물었다. 내시는 도움을 받은 사람이 없으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때 빌립 집사는 이사야 본문을 정확하게 해석해주면서, 성경을 보는 눈을 뜨게 해줬다. 사도행전 8장에 기록된 이야기다. 성경을 읽는 것과 해석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일이다.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물론, 성령의 인도를 받고 성경을 해석해야한다. 그때, 성경을 성령의 인도를 받고 해석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빌립 집사는 내시에게 어떠한 성경해석법을 알려준 것인가? 성경을 성경으로 올바르게 해석하는 법을 알려줬다. 모든 글은 읽는 순간 독자의 해석을 받게 된다. 문자를 문자 그대로 읽는다고 하지만, 사람이 읽는 순간 인식의 바다에 그 문자는 투영된다. 이것은 해석의 바다다. 그러므로, 올바르게, 성경적으로 해석하는 법을 날마다 스스로 터득하고 훈련해야한다. 성경을 읽든, 책을 보든, 드라마를 시청하든, 저자와 본문과 독자는 삼각관계를 이룬다. 셋의 연결고리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독자는 저자의 의도를 연구하면서 성경의 의미를 추적할 필요가 있다. 더불어, 독자가 본문을 해석할 때, 독자의 인식관이 투영됨으로 읽는다는 사실도 인정해야한다. 선입견은 누구나 있다. 글쓰기에 규칙이 있듯이, 독서에도 규칙이 있다. 야구와 농구에 규칙이 있듯이 그렇다. 특히 성경은 고전이다. 고전은 고전을 읽는 해석법이 필요한데, 그것을 모르고 성경을 무턱대고 읽게 되면 작가의 의도와 다르게 엉뚱한 해석을 할 수도 있다. 성경은 문학적 장르를 가지고 있다. 시와 이야기와 역사와 법률과 비유와 편지와 예언이다. 각 장르별로 장르에 맞게 해석해야한다. 시는 시로 해석해야지, 시어를 현실적으로 그대로 이해하면 안된다. 마태복음 24장은 예언적 시어로 실제 역사적 사건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그것을 알고서 해석하면, 오해가 없다.
스토리텔링과 관련해서, 기업들은 제품홍보만 할 뿐, 스토리텔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왜, 안데르센 동화를 잊지 못할까? 양치는 소년 이야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거짓말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거짓말을 하면 안된다는 도적적 교훈이 ‘양치는 소년’의 이야기 속에 숨겨진다. 이야기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생명력을 가진다. 이야기는 파괴되지 않는다.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했지만,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한 그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노아의 마을은 홍수심판을 받았으나, 그 마을에 대한 홍수심판 사건은 지금까지 남아있다. 이야기는 영원성을 가진다. 스토리는 제품과 전혀 다르다. 성경의 복음서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로마서는 스토리가 아니다. 로마서는 교리서이고, 복음서는 스토리텔링으로 되어있다. 마태복음은 족보 다음에 이혼할 뻔한 어떤 ‘요셉과 마리아 부부’가 천사를 통해 결혼에 성공하고, 이후에 헤롯대왕이 유아대학살을 했지만, 구사일생으로 이집트로 피신한 내용이 나온다. 이것은 이야기다. 누가복음의 이야기 전략은 전혀 다르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사가랴에게, 사가랴의 아내에게 나타나서 예언한 것이 처음에 나오고, 누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사용한 다양한 비유들이 나온다. 이것도 이야기 전략이다. 이야기는 허구가 아니고, 진실한 사건을 스토리텔링의 전략으로 펼치는 것이다. “예수님은 구세주다”는 진리를, “십자가는 죄사함의 권능이다”는 그 진리를 전할 때, 복음서는 “이야기의 그물”로서 세상을 향해 던진 것이다.
길을 가다가 큰 개가 있으면, 두렵다. 개가 끈이 풀리면,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서, 발로 걷어찰 채비를 한다. 그것은 정당방위다. 개가 갑자기 나를 향해 인상을 쓰면 나는 개주인을 향해 으르렁거린다. “개새끼가!”라고 개주인을 향해 말한다. 개가 나를 보고 짖었기때문이다. 개가 나를 물지 않았지만, 내가 그것을 스스로 막지 않으면, 물릴 위험이 높다. 개는 무서운 동물이다. 개를 파악하듯, 사람은 마음속을 잘 관찰해야한다. 골목처럼, 마음의 골목에서 응크리고 있는 개, 꽃, 곤충, 슬픔과 기쁨과 환희의 나비들을 알아야한다. 자신이 자신을 알지 못하면, 누가 자신을 알겠는가? 외부는 내부의 투영이며, 거울이다. 사람을 보면서, 그 사람의 거울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이 작가다. 작가는 내면의 관찰자이다. 세상을 보면서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이 곧 작가다. 작가의 통찰력은 자신에게 귀결된다.
소통은 언어의 문제인가? 심리의 문제인가? “소통”은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데, 핸드폰을 비롯해서 소통을 위한 과학기술은 최첨단으로 발달하고, 바벨탑을 쌓듯이 전세계는 하나로 연결되었는데, 왜 불통일까? 언어의 혼잡은 핸드폰과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곳곳에서 빚어지는 사회현상이다. 왜지? 곳곳에서 삐걱대는 불통의 갈등은 인간의 본질을 진단하게 한다. 인간으로서 귀한 존재인데, 뜻과 생각을 공유하고, 서로 이해하며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싶지만,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마음이 원하는대로 되지 않는다. 소통의 문제는 미적분을 푸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사칙연산과 같은 기본적인 언어문제일 확률이 높다. 언어의 속성을 제대로 알고서 우리는 대화를 할까? 소통은 곧 대화다. 대화의 초보자로서 우리는 살고 있다. 언어충돌은 목숨을 건 소송전쟁으로 확산된다. 왜, 마음이 통하는 그런 대화를 나누기가 힘들까? 사람이 많아도 사람이 없는 부존재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다. 대화에도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 우선, 드라마를 보거나, 혹은 부모는 자녀와, 자녀는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상대의 말을 듣는 훈련을 해야하고, 나아가 자신의 말이 상대방에게 전달되는 것을 스스로 발견할 수 있어야한다. 상대의 말을 듣는 훈련, 내가 한 말이 상대방에게 전달되는 것을 인지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소통은 언어의 전달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과 사람의 대화도 글쓰기요, 날마다 하루의 일과를 반성하면서, 일기를 쓰는 것도 글쓰기에 중요하다. 글쓰기는 ‘과거의 부활’이다. 그날 있었던 일을 다시 돌아보면서, 사람은 과거로 여행을 시작한다. 타임머신은 과학자의 일이 아니다. 작가로서, 누구든지 글쓰기로 뇌는 과거로 착륙한다. 내가 지금, 2시간 전에 전화통화를 했던 그 일을 떠올린다면, 나는 2시간 전의 과거로 여행한다. 글쓰기의 재미는 여기에 있다. 과거를 떠올릴 때, 뇌는 흥분한다. 마음이 뛴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 전화통화, 좋은 사람과 가졌던 좋은 추억은 감성을 자극한다. 왜, 과거여행을 꿈꿀까? 타임머신으로 과거를 여행하고 싶다면, 글쓰기를 통해서 추억의 세계로 들어가면 된다. 뇌는 이미 그 세계에 위치할 것이다. 글은 과거와 현실을 하나로 합하고, 나와 너를 연결한다. 화법은 삶의 공유이며, 나눔이다. 스타벅스 까페를 가면, 수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만든다. 이야기가 없다면, 사람들도 없다. 사람을 안다는 것은 말을 알고, 말로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