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데교회를 향한 편지는 핵폭탄이다. 다른 편지와 색채가 다르다. 사데교회에서 ‘사’는 죽을 사(死)로 보여진다. 한자로는 ‘撒狄敎會’(살적교회_사데교회)로 표기한다. 이곳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경제적 풍요가 흘러 넘치는 곳이다. 한국교회를 연상시킨다. 성공과 명예와 풍요와 부귀영화가 과연 ‘영생’을 담보할까? 성공과 실패, 모두 ‘영생과 구원’을 얻는 데 밑거름이다.
성공함으로 구원의 열매가 더욱 풍성해질 수도 있고, 실패를 통해 구원의 열매가 더욱 감미로워질 수도 있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실패가 신앙의 좌절로 이어지고, 성공이 신앙을 썩게 할 수도 있다. 사데교회는 매우 풍요로운 교회였고, 빌라델비아 교회와 흡사했다. 부자교회는 모두 ‘경고장’을 받았다.
예수님이 사역을 펼쳤을 때, 가장 부유했던 가야바 대제사장 가문은 ‘살인자 가문’으로 심판받았고, 권문세족처럼 정치적 권력을 누렸던 헤롯가문의 왕족들도 “멸망”의 판결이 떨어졌다. 반면, 가난했던 제자 공동체는 성령을 받고, 새 언약 백성의 주인공이 됐다. 부귀영화는 영생과 정비례는 아니다. 오히려 반비례 관계로 나타날 때가 많다.
사데교회가 있던 곳은 아이성처럼 높은 산위에 세워졌다. 난공불락 성이다. 페르시아의 키루스(고레스) 2세가 사데지역까지 침공했다. 사데지역 리디아 왕국은 크로이소스가 다스렸는데, 난공불락의 바위성에서 사이러스 왕과 대결했다.
“할리스 강을 건너면 당신은 위대한 제국을 멸망시킬 것이다” (델포이 신전의 신탁 내용)
위 신탁을 믿고, 리다아 왕국의 크로이소스는 페르시아 군대와 대결했는데, 참패했다. 그 왕은 신탁을 절대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에, 성문을 굳게 닫고 끝까지 저항했다. 그러나, 전쟁은 키로스 왕의 승리였고, 리디아 왕국이 멸망했다. 위대한 제국은 ‘리디아 왕국’이었고, 위 신탁은 위대한 예언으로 명성을 날렸다. 이러한 예언은 양면성 신탁이라고 한다. 누가 이기든지 예언은 성취되도록 ‘모호성’으로 표현된다. 위대한 제국은 과연 어디인가?
전쟁에서 참패한 이유는 ‘바위틈’ 때문이다. 사데 성의 기초 암석은 석회암으로 되어 있어서, 부서지기 쉬웠다. 페르시아 군대는 14일간 사데 성을 포위하고, “성안으로 들어간 자에게 큰 상을 내리겠다”고 했다. 그때 페르시아 군인이 사데 성의 발포대를 가만히 살펴보고 있었다. 사데 성의 군인이 철모가 떨어졌다. 데굴데굴 굴러간 철모를 줍기 위해 사데성 군인이 밑으로 내려갔다. 그것을 유심히 살펴본 페르시아 군인은 “바위틈새로 사람이 지나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특공대를 조직해서 그날밤 바위밑의 틈새로 들어갔더니, 발포대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데성은 그렇게 함락됐다. “도둑처럼 올 것이다”고 한 것은 ‘사데성의 역사’를 통해 주님이 경고한 것이다.
절대로 안심하는 그것이 적의 틈이 될 수 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절대로 신뢰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율법 때문에 죄가 함께 왔다”고 선언했다.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유대인은 죄가 무거워졌고, 오직 십자가의 대속만이 그들의 죄를 풀 열쇠였다. 등잔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신뢰하는 그곳으로 마귀가 들어올 수 있다. 극히 조심해야한다. 박근혜 대통령도 가장 믿었던 최순실을 통해 권력이 무너졌고, 서울을 함락한 북한도 가장 믿었던 인천을 통해 UN의 공격을 받았다. 우리가 의지하는 ‘공적’이 마귀의 틈이 될 수 있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성령과 주님’이다. 주님께서 도둑처럼 오시니, 우리는 주님을 믿고서, 주님과 함께 깨어있어야 한다.
십자가의 공적으로 ‘의인’으로 칭함을 받은 이신칭의(以信稱義)를 절대적 믿음으로 확증할지라도, 지나친 의인의식이 ‘과신’의 교만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 이신칭의(以信稱義)의 핵심은 ‘육신은 죄인이다. 영혼은 성령으로 의롭다’이다. “육신은 죄인이다”는 전제가 매우 중요하다. 영은 구원을 받았어도, 육신은 항상 죄속에 빠지기 쉬운 존재이니, 우리는 육신의 행실을 다스려야한다. 그것을 망각하면, 육신이 죄의 사슬에 묶여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는 바울의 고백을 계속 되풀이하면서, 부끄러운 구원을 받게 될 수도 있다. 어차피 받은 구원의 영광인데, 더 높은 상급에 도전하는 것이 마땅하다. 사데교회처럼 ‘살았으나 죽은 자’로 살아서는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