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의 사자굴 구원사건”은 “다니엘의 세친구 풀무불 구원사건”과 연결된다. 바벨론 포로생활의 풀려남을 확증한 표적이다. 다니엘의 승리는 이스라엘의 승리다. 여기서 ‘다니엘’은 하나님을 대표해서, 하나님이 이기신 것이다. 다니엘서 전반에 걸쳐 흐르는 핵심 키워드는 “하나님의 행하심”이다. “꿈”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계시이듯, 권력도 돈도 지혜도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지혜는 빛이요, 지식은 그림자다.
다리오왕과 고레스왕은 분명히 다르다. 6:28에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고 했다. 바벨론 포로해방은 고레스 황제를 통해서 이뤄진다. 다리오 왕과 고레스 왕은 연합관계다.
다니엘의 믿음은 무엇인가?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인 것을 알고도” 하나님을 믿은 것이다. 그는 평소에 3번씩 창문을 열어놓고,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했다. 그 기도의 향연이 하늘로 상달됐다. 벨사살 왕이 본 손가락 문자의 비밀도 다니엘의 기도와 깊은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다니엘은 어떤 순간에도 목숨을 아끼지 않고, 성령의 소리를 대언했다.
제국이 바뀌고, 다니엘은 총리가 되었으니, 이런 부귀영화가 어디에 있는가? 권력을 준 다리오 왕의 눈치를 살필 법도 한데,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권력을 줬다고 믿었다. 그래서, “전에 하던대로 하루에 세 번씩” 계속 감사한 것이다. 하나님과 다니엘의 연합을 다리오 왕이 끊을 수 없다. 다리오 왕이 다니엘을 사랑하여도 그렇다. 남편은 아내와 주님의 연합을, 아내는 남편과 주님의 연합을 끊을 수 없다. 부부의 연합보다 깊은 것이 성도의 성령의 연합이다.
사자굴에 던져졌는데, 다니엘은 구원을 받았다. 그날 밤 다리오 왕은 밤이 새도록 금식하고, 그 앞에 오락을 그치고, 잠자기를 거절했다. 다리오 왕은 불면증에 시달리면서 다니엘을 걱정하며, 새벽이 오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의 영혼을 걱정하고, 보살피고, 기도해주신다. 놀랍게도, 다니엘은 살아났다. 사자들의 입을 봉하심으로,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구원했다. 다니엘은 이때 80세 노인이다. 힘으로 사자를 상대해서 무찌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위해 사자들의 입을 막은 것이다. 사자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정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참소함으로 다니엘을 괴롭혔다. 결국, 다니엘을 참소한 자들이 사자굴에 던져졌다.
구원(救援)이 무엇인가? 경제적 구원, 정치적 구원 등등 다양한 구원이 있을 수 있다. 6:14에서도 다리오 왕이 다니엘을 구원하려고 마음을 썼다.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지지 않게 하는 것도 ‘구원의 종류’이다. 성경적 근본의 구원은 영혼구원이다. 영혼구원이 ‘영생’이다. 사람은 사망앞에 처참하게 무너진다.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를 내려놓고, 죽어야한다. 죽으면, 시체는 흙으로 흩어진다. 기억도 사라진다. 주님을 믿으면 사망의 간섭을 받지 않고, 육체가 살아있는 때부터 그 영혼이 영생을 받는다. 영혼이 영원히 사는 것이며, 영혼이 가지고 있는 권력과 소유와 기억을 영원히 지속한다. 이것이 영생이며, 구원이다.
다니엘을 구원한 것은 다니엘의 믿음인가? 다니엘의 기도인가? 다니엘의 찬송인가? 근본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다니엘이 사자입을 봉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의 상황을 보고,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서 사자들의 입을 막은 것이다. 십자가의 피흘림이 사람에게 임하면, 사망이 물러간다. 죽음의 십자가는 죽음을 물리친다. 죽음의 십자가는 세상을 물리치는 ‘하늘의 빛’이다.
왕의 도장이 찍힌 조서를 읽고도 다니엘은 기도했다. 하나님의 도장이 다니엘의 이마에 찍혀있기 때문이다. 설령 권력의 칼에 죽임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의 도장이 찍혀서 살아야한다. 세상권력에 빌붙어 비굴하게 살아서는 안된다. 마음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 돈? 권력? 명예? 부귀영화? 칼? 지식? 스스로 살펴야한다. 다니엘을 참소한 자들이 다니엘을 국정조사를 해보니, “하나님의 율법”으로 정의됐다. 다니엘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았던 것이다. 다니엘은 하나님께 열심히 행한 그것으로 참소를 받았다. 오!! 얼마나 위대한 신앙인가!! 하나님을 향한 그 열정이 세상의 거리낌이 되었다. 믿는 성도는 이렇게 살아야한다.
보수적 기독교는 기복신앙으로 흐르면서 복음이 훼손됐고, 진보적 기독교는 사회혁명으로 흐르면서 복음이 변질됐다. 복음의 원음은 성경에 있다. 루터가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한 것은 성경의 원음으로 성경을 해석하자는 것이다. 예수님이 전한, 바울이 전한, 마태가 외친, 마가가 쓴, 누가가 말한 그 복음의 원음으로 돌아가야한다. 복음의 원음을 잃어버린 기독교는 ‘기복종교’일 뿐이다. 본래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생명을 살리고, 영혼을 구원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창조적 능력이 있는 ‘성령의 역사’였다. 성령의 역사는 믿는 자에게 신적 생명과 신분을 부여한다. 그것이 영생(신적 생명)과 하나님의 아들(신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