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뇌제(雷帝)는 차르 이반 4세를 뜻한다. 공포정치로 유명하다. (조선일보 A34 참조, 20191127수) 반대자를 빗자루로 쓸고 쇠망치로 뇌를 강타해 죽음으로 통치한 황제, 공포정치의 대명사다. 숯불에 굽고, 솥에 삶고, 살갗을 벗기고, 사지를 자르고, 아들까지 쇠몽둥이로 강타해 죽였다. 아들을 죽인 그 사건이 치명적이다. 상속자를 죽인 것이다. 자신의 왕국을 계승할 자식인데, 쇠몽둥이로 내려쳤다. 이반 뇌제가 며느리의 옷이 단정하지 못하다고 꾸짖자, 아들이 끼어들면서 심기를 불편케 하자, 그 자리에서 쇠몽둥이로 아들을 때렸고, 며칠후 아들은 죽었다. 그로 인해, 천치 상태에 있는 다른 장애인 아들이 왕권을 물려받고, 몰락했다.
진시황제도 동일했다. 천하통일을 하고서, 맏아들 부소는 진시황제를 향해 ‘올바른 통치’를 건의했다. 그것이 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고, 진시황제는 부소를 변방에 유배보냈고, 둘째 아들 호해가 진시황제를 암살하고, 유언장을 위조해서 부소까지 죽이고서 진의 제국은 몰락했다. 자유가 권력과 결합하면 공포정치가 된다. 자유(自由)는 자신으로 말미암는 것이며, 자신의 자유가 핵심이다. 자신의 자유가 남의 자유를 제한한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하다. 자유를 즐기는 자는 그것을 간혹 모를 때가 있다.
나는 언론인으로 살다보니 ‘질문의 자유’가 넘쳐났고, 비판할 수 있는 권한이 국민으로부터 주어져서, 너무나 좋았다. 그래서 비판하는 기사를 자주 썼고, 공인에 대해서는 실명을 거론했다. 그러나, 그러한 자유가 기업의 이익을 침해하고, 공인으로 활동하는 개인의 인격을 침해하면서 명예훼손에 해당한다는 것을 뼈속깊이 깨닫게 되었다. 상대의 마음을 침범하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나의 자유가 소중하면, 상대의 자유도 소중하다. 그것이 자유의 본질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의 자유’로 고기를 먹을 수 있으나, 그것이 남의 자유를 침범한다면, 먹지 않겠다고 했다. 자유의 포기도 ‘자유의 범주’에 속한다. 자유를 포기할 자유도 개인에게 주어진다.
진시황제와 이반 뇌제는 자신의 상속자를 죽이는 ‘자유의 만용’에 빠진 것이다. 권력의 독주에 취하면, 자신의 오른팔을 자르면서도 그것을 모른다. 권력은 자유가 아니다. 독재는 포용이 아니다. 그런데, 독재자는 자신이 독재한다는 것을 모른다. 이반 뇌제도 자신의 정치를 ‘공포정치’로 생각하지 않고, ‘악을 징벌하고, 심판하는 신의 대리인’으로 여겼다. 이것이 가장 끔찍한 형벌이다. 알았다면, 자신의 아들을 죽이지 않았다. 이사야서 1장과 2장에서도 하나님께서 심판할 때는 먼저 지도자를 없앤다. 국가를 심판할 때, 국가를 다스릴 지도자를 없애면, 국가의 행정권이 마비된다. 능력없는 자가 국가를 통치하면 국가는 마비된다. 이반 뇌제가 총망받는 아들을 죽이자, 그 가문이 몰락했다. 유대교는 율법의 마침표는 예수님을 버렸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었다. 듣는 지혜가 말의 지혜보다 크다. 들음에서 지혜가 생긴다.
인헌고 사태와 홍콩 시위가 다른 점이 있는가? 나는 같다고 본다. 중국이 공포정치로 홍콩 시민을 위협하면, 결국 중국정부 전체가 무너질 수도 있다. 인헌고도 동일하다. 학생을 통해서 그들의 오류를 말하고 있는데, 그것을 계속 인정하지 않는다면, 결국 전교조의 나무가 뿌리뽑힐 수도 있다. 진보교육감은 씨가 마를 수도 있다. 학생이 외칠 정도면, 얼마나 썩었는지 실감할 수 있다. 국가는 국민이 주인이고, 학교는 학생이 주인이다. 인헌고는 교장과 교감과 교사들이 모두 운동장에서 학생처럼 집결해, 공개사과해야한다. 그래야, 학생들도 비로소 학생의 자리로 돌아가서, 인헌고를 향한 자긍심을 가질 것이다. 어른들이여!! 학생의 자유를 뺏지말자!! 학생들은 도구가 아니다. 존귀한 자유의 영혼을 가진 위대한 대한민국 동량(棟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