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심판에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심판이 있다. 목자는 들판에서 ‘양과 염소’를 함께 목축한다. 저녁이 되면 우리속에 들여보내면서 양과 염소를 각각 구분한다. 세상에는 의인과 악인이 함께 섞여 살지만, 하늘 세계는 의인과 악인이 섞여 있지 않다. 구분된 세계다.
마태복음 25장에는 분명히 ‘의인과 악인의 구분세계’를 말씀한다. 그런데,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는 기준이 무엇일까?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다. 이것을 놓고 성경학자들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곧 그 시대 제자공동체의 사도들이며, 제자들이며, 선지자들이라고 한다. 그것도 맞겠지만, 사람들이 보기에 “지극히 작은 자”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의 사람”이니, 그에게 한 것이 하나님께 한 것이다. 누가 하나님의 사람인지, 어느 순간에 그렇게 하시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그 때와 그 시기를 누구도 알지 못하듯이 그러하다. 그래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판단하지 말고, 편견을 갖지 말고, 넘어진 사마리아 인을 도와야한다. 그 사마리아 인이 그리스도의 형제일 수 있음이여!!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강도만난 자가 유대인인지, 사마리인인지, 없다. 분위기로 보아서 유대인으로 해석될 뿐이다. 사마리아 인은 원수같은 유대인을 도왔으나, 유대인은 원수같은 사마리아인이 강도를 만나서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판단했을 수도 있다. 동족을 돕지 않은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다양한 변수가 존재한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그리스도에게 한 것과 같다. 실제로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서 그에게 한 것이 자기에게 한 것과 같다고 분명히 말씀했다. 그 어린아이가 제자 공동체를 상징한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그 어린아이는 인격체로서 어린아이다. 1명의 개인에게 행한 그것이 그리스도에게 행한 것이다. (마태복음 18장)
[마태복음 18:1~6]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마지막 심판 때에 보편적인 구원이 이뤄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각각 “양이냐, 염소냐”가 구분된다. 사람은 남자면서 여자일 수 없다. 남자면서 여자라고 한다면, 그것은 ‘새로운 성별’로서 구분된다. 이것이면서 저것일 수는 없다. 의인이면서 악인일 수 없고, 악인이면서 의인일 수도 없다. 둘 중의 하나로 구분된다. 양의 우리에 들어가면, 염소의 우리에 들어갈 수 없고, 염소의 우리에 들어가면 양의 우리에 들어갈 수 없다. 각각 구분된 영적 세계다.
학생부 종합전형의 수시 시험을 볼 때, 고등학교가 명문고라고 한다면 그 받는 혜택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 1명 1명이 인터뷰를 보고, 시험 성적표는 각각 부여된다. 단체의 공동체속에 개인의 구원이 들어있다. 어떤 공동체에 속했어도, 그가 어떻게 행하느냐가 구원을 결정된다. ‘그가 어떻게 행하느냐’에는 율법적 도덕률과 함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은혜도 모두 포함된다.
십자가의 은혜를 믿지 않고 스스로 구원을 이루려는 율법주의자들이나, 십자가의 은혜만을 신뢰하면서 불법을 행해도 죄가 아니라는 구원파 성도들이나, 무엇이 다르겠는가? 십자가의 피흘림을 믿지 않는 자나 그 피흘림을 믿는다면서 행위로서 더럽히는 자들이나 결국 동일한 형벌이 예비될 뿐이다. 스스로 자신을 겸비할지라!! 남을 판단하면서 자신도 그것을 행하는 자들은 어리석다.
“내가 보기에 저 사람의 과거는 어떠하다”는 인식이 머릿속에 있다면, 그 사람은 집단적 폐쇄주의에 갇힌 존재다. 주님이 보시기에 의인인지, 악인인지, 그것이 중요하다. 양과 염소를 구분한 분은 주님이지, 제자들이 아니다. 주님이 모든 사람들의 행위를 보고서 양과 염소를 구분했다. 주님께서 판단하신다.
향유옥합을 부은 마리아를 놓고, 제자들이 수근거렸다. 가룟유다는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주님은 공개적으로 향유옥합을 부은 마리아의 행위를 칭찬하면서, “그를 기억하라”고 말씀했다. 마리아의 행위를 통해 양의 자리가 주어진 것이다. 마태복음 26장 사건을 통해 25장 양과 염소 비유가 실제로 어떻게 나타나는지 알 수 있다. 베다니 마리아를 판단했던 가룟유다는 염소의 자리로 구분된다. 그래서 남의 과거를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그 판단이 죄가 될 수 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여서, 그것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