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날마다 복음서를 읽고, 신문을 읽는다. 복음서와 신문을 함께 놓게 되면, 그것이 ‘현실을 새롭게 하는 영성’이다. 세상뉴스는 읽을수록 어둠이 깊어지고, 복음은 빛이다. 뉴스와 복음을 함께 두면, 영락없이 계시록이다. 복음은 내 이마에 ‘진리’를 도장찍고, 뉴스는 내 이마에 ‘거짓’을 도장찍는다. 중독이 곧 ‘세뇌의 도장’이다. 무엇으로 중독될 것인가? 그것이 핵심이다.
계시록을 읽을 때는 2장과 3장에 나오는 일곱교회 편지를 앞에 펼쳐놓고 읽어야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계시록은 일곱교회에 보낸 편지다. 그들이 어떻게 계시록을 받아드렸을까? 우리는 초대교회 성도의 전율을 느끼기 어렵다. 왜냐면, 순교자가 없고, 니골라당이 없고, 이세벨이 없고, 행음한 주의 종들도 없고, 사탄의 권좌도 없다. 계시록을 읽는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들은 어떠할까?
계시록의 핵심은 교회안에 침입한 사탄의 비밀을 폭로한 것이다. 더불어 세상권력의 종말을 선언한 것이다. 교회내부에 들어온 ‘용의 머리’가 있으니, 그것이 ‘니골라당의 교리’이며, ‘이세벨의 행음’이다. 용을 추앙하는 짐승의 세력들이 어린양과 더불어 영적 전쟁을 했다. 그 영적 전쟁이 교회안에서 이뤄진다. 성도들은 어떻게 싸워야하는가? 찬양과 기도와 예배와 복음전파로 하는 것이다. 말씀의 인봉을 떼고, 일곱 나팔을 불고, 일곱 대접을 쏟는 것은 모두 말씀과 찬양과 기도가 영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어떤 교회는 뜨거운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돈과 권력’으로 종결되어, 세상의 화석이 되버렸다. ‘여리고 교회’라고 불릴 것이다. 돈과 권력으로 장식된 교회속에 주님은 무엇을 하실까? 주님의 이름을 우리가 받는 것은 그 말씀을 행하기 위함이다. 왜, 중세사회를 ‘암흑의 시대’라고 하겠는가? 예수의 이름은 있지만, 그 능력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 시대도 동일하다. 단상에서 ‘어린양의 복음’이 선포되어야한다. ‘용의 교리’가 선포되는 곳에는 짐승의 권력만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인치는 역사가 있고, 동시에 마귀의 인치는 역사가 있다. 둘은 동시에 진행된다. 장안평 지하철 역에 내리자, 나이트클럽 전단지를 나눠주고, SIN단체 전단지도 배포되고, 정통교회 전단지도 홍보된다. 꼭, 선거유세를 하는 것 같다. 모두 믿는 것을 전파할 것인데, 어린양 예수님이 ‘하나님의 인감도장’이다. 나머지는 가짜다. 그래서 복음을 날마다 읽고 묵상하면서, 교회 예배를 드려야한다.
세상속에 빠지면, 세상뉴스로 물든다. 그렇게 계속 끌려가면, 줄다리기에 끌려가듯 세상 늪에 빠진다. 세상을 끌고 와야지, 끌려가면 안된다. 세상을 끌고 오는 것이 바로 복음으로 사는 것이다. 계시록의 목적은 일곱교회의 부흥이지, 세상권력의 멸망이 아니다. 만약, 세상권력의 멸망이 목적이었다면, 편지 수신인이 로마제국이었을 것이다. “네로 앞”으로 해서, 계시록이 작성되었을 것이다. 주님은 ‘일곱 교회’ 앞으로 해서, 계시록을 보냈다.
교회가 살아야, 세상도 산다. 교회가 죽으면, 세상도 죽는다. 교회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함이 있어야한다. 교회가 세상과 동일하다면, 소금이 짠 맛을 잃었으니 바깥 어두운 곳에 버려진다. 즉, 세상으로 넘어간다. 소금은 짠 맛을 가져야한다. 그래야, 소금이 소금역할을 한다. 옛날 고대사회에서 ‘소금’은 ‘마귀’를 물리치는 도구였고, ‘빛’은 ‘어둠’을 물리쳤다. (소금을 뿌리듯, 어린양의 피로 죄가 죽고, 마귀가 물러간다.)
교회는 마귀를 물리치고, 세속을 멀리한다. 교회가 세속에 물들면, 제우스 신당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북한과 중국의 교회에도 십자가는 있다. 예수님의 이름도 있고, 찬양도 있다. 그러한 교회에 성령이 임하지 못하듯, 자본주의에 물든 교회안에서 성령의 거룩함이 사라진다. 그래서, 성령으로 현실을 깨워야한다. 그것이 복음의 본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