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주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을 믿는다. 그 주님께서 행하신 것은 당신에게 속한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셨다. 속하지 않은 자들을 위해서 기도한 것이 아니다. 당신에게 속한 제자들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기도하였고, 그들의 죄를 사해달라고 간구했다. 이것이 요한복음 17장이다. 이 기도를 하시고, 주님은 십자가의 홍해로 들어선 것이다.
기독교의 본질은 “세상속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이다. 휴거처럼, 세상에서 벗어나 하늘로 올라가거나, 산속으로 은둔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본래 기독교는 창조주께서 이 땅에 내려와서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이다. 그것이 성육신이고, 십자가 사건후 무덤속 부활이다. 탄생에서 죽음까지, 죽음 이후부터 지금까지 주님은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
계시록 1장에도 보면, 사도요한이 목격한 주님의 모습은 오른손에 일곱별을 들고, 일곱 금촛대 사이로 다니셨다. 일곱 금촛대는 일곱 교회다. 일곱교회는 세상속에 존재한다. 주님은 교회를 날마다 방문하고, 교회 목회자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감찰하고, 돕고, 격려한다. 교회의 목회자는 주님이다.
주님은 막연하게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포도나무는 그 나무에 붙은 가지에만 진액을 공급한다. 주님께 붙지 않은 가지는 버려진다. 주님께 붙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주님께 붙는 방법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곧 “서로 사랑”이다. 형제사랑은 무엇보다 중요한데, 여기서 형제는 주님을 믿는 성도들이다.
물론, 세상을 향해 복음의 빛, 사랑의 빛을 비춰야겠지만, 허물과 모순이 보이는 형제들을 향해 중보기도를 하고, 어려움에 처한 형제의 생활고를 외면하지 않고, 도울 수 있는 모든 것으로 돕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사랑은 말로 떠드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여건에서 날마다 실천하는 것이다. 성령충만은 곧 사랑충만이다.
우리는 계시록을 읽으면서, 세상적 종말을 두려워하는데, 계시록에서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시록 18:4)고 했다. 이것은 세상을 떠나라는 뜻이 아니다. 그들의 불의에 동참하지 말라는 것이다. 성도들은 날마다 세상속에서 세상을 떠나는 영적 훈련을 해야한다. 그것이 ‘영적 출애굽’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니이다.” (요한복음 1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