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은 ‘오병이어 사건’에 대한 팩트는 동일하다. 반면, “해석”이 다르다. 공관복음에서 오병이어는 “기적”으로 묘사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표적”과 함께 “불신”이 함께 거론된다. 공관복음에서는 오병이어 표적 이후에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나오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오병이어 표적 이후에 “제자들의 불신”과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나온다. 오병이어 표적은 제자 공동체의 위기상황을 초래했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 오병이어 표적을 맛본 그들에게
오병이어는 떡 다섯과 물고기 두 마리다. 그것으로 5천명을 먹인 엄청난 표적사건이다. “어떤 방법”은 생략됐다. 생략한 이유에 대해 독자들은 궁금해할 것 없다. 사도 요한을 신뢰한다면, 그가 생략한 것을 믿는 것이 옳다. 뭔가를 생략하면, 생략된 그림으로 진실이 드러난다. 이것이 관점이다. 사도 요한이 보여주는 ‘오병이어 그림’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어떻게 5천명을 먹였는가?”라고 질문하는 것은 핵심주제에서 벗어난다.
이 사건은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의 의미에 있다. 상당히 간단한 문장이지만,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떡”을 실제 떡으로 볼 수도 있고, 비유의 떡으로 볼 수도 있어서 그렇다. 바로 뒤에,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는 것을 통해, “떡”은 썩을 양식으로 풀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다. “표적”을 본 그들은 “표적의 액면가”만 쳐다본 것이다. “떡”의 생존문제를 예수님께 요구하니, 예수님은 그들을 거절했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하니, 베드로가 그물이 찢어지도록 물고기를 잡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다. 그런데, 오병이어 표적을 본 백성들은 “그물질”을 계속 하고 있는 것이다. 표적을 보여준 것은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 물고기를 잡게 해주면서, 예수님은 “사람을 잡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처럼, 오병이어 표적을 보여준 것은 “모세가 먹었던 그 만나와 같은 생명의 떡이 여기에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곧, 예수님의 말씀이 생명의 떡이며, 살이며, 피(血)다. 그런데, 그것을 들으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은 ‘인식의 그물’ 때문이다. 인식의 그물을 버리지 못하면,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 백성들은 계속 “떡, 떡, 떡”만 요구하니, 말씀도 “떡”으로만 들린다. “먹는 떡”만 생각하니, “생명의 떡”이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대부분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났다. 교회에서 “십자가와 진리의 말씀과 양심과 정직과 복음의 본질”만 강조하면, 성도들이 그대로 남아있을까? 예수님은 성도의 숫자에 신경쓰지 않고, “복음의 원음”을 전한 것이다.
요한복음 6:60에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고 제자들이 솔직한 심경을 고백한다. 말씀의 내용이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드리가 어려웠던 것이다. 예수님은 아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현실적으로 성전도 없고, 권력도 없고, 돈도 없는데, 누가 예수님을 따르겠는가. 그런데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르면서 배가 고파도 따르는 것이 “정답”이라고 하니, 그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생명의 떡”을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떠한가? 주님의 말씀을 주식(主食)으로 과연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