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리(攝理)는 ‘들음의 다스림’이다. 섭(攝)은 ‘당길 섭’이다. 손(手)과 섭(聶)의 합성이다. 聶은 소곤거릴 섭이다. 귀가 3개가 있다는 것은 ‘쫑긋’ 귀를 세운 것이다. 얼마나 작게 말했으면, 얼마나 자세히 듣고 싶었으면, 문지방에 귀를 세우고 듣겠는가. ‘들음’은 모든 통치의 기본이다.
귀(耳)는 외이(外耳), 중이(中耳), 내이(內耳)가 각각 존재한다. 3개의 귀는 각각 상징적인 의미로서, 상대방의 말을 잘 알아들어야한다는 것, 이는 말귀로서 문맥을 의미한다. 둘째, 상대방이 말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 셋째 상대방이 말하고 싶은데 말하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 즉 내면의 소리다.
상대방이 지금 하고 있는 말의 의미를 먼저 제대로 파악해야하고, 둘째 상대방이 지금 말하고 있으면서 말하지 않은 것이 또 무엇인지 파악해야하고, 셋째로 상대방이 그 말을 하는 궁극적인 목적 즉, 그 말을 하면서 정말로 하고싶은 말인데 ‘말하지 못한 것’을 파악해야만, 그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가 있다. 귀(耳)에는 이런 상징성이 있는데, 섭(攝)은 3개의 귀를 합쳐서 귀를 모았으니, ‘진실로 듣겠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진실로 들으신다. 한자로 ‘하나님 야’(耶)는 귀가 언덕처럼 크다. 이 또한 ‘들음’이다.
30년 동안 있었던 종교단체는 내게 몇가지 유익을 줬다. 그 중 하나는 ‘받아쓰기’ 필기습관이다. 고등학교때 배웠고, 30년간 내 습관이다. 1999년 이후로 그곳 성도들은 필기습관을 잃어버렸다. 설교문이 배포되니, 적지 않았다. 나는 그때도 계속 적었다. 언론인이 되면서, 편집장이 나를 취재현장에 보냈다. 내가 물었다.
“취재는 어떻게 해요?”
“자세히 보고, 잘 듣고, 강조하는 말을 적어. 배포하는 유인물은 반드시 챙기고, 반대쪽 사람도 꼭 만나서 잘 들어!! 사진은 가능하면 많이 찍어!!”
나는 그 편집장의 교육을 그대로 실행했고, 지금도 변함없다. 현장에 가면, 계속 듣는다. 받아쓰기다. 1시간 정도 들으면, 핵심이 파악된다. 모두 듣고, 이해가 안되는 것을 몇 개 질문하고, 인터뷰를 마친다. 가끔, 누군가를 비판하면, 비판받은 사람의 전화번호를 물어본다. 사실확인의 저널리즘이다. 계속 듣다보니, 나는 작가가 되었다. 처음엔 들은 대로 썼지만, 나중엔 훈련이 되어서 들은 것을 숙성해서 썼다. 들음에서 ‘쓰기’가 파생한다.
부끄러울 치(恥)는 귀와 심장이 합쳐졌다. 혹은 들음과 마음이다. 듣는 마음을 가지면, 부끄러움을 알게 된다. 말씀을 깊게 들으면, 자신의 모습이 보이고, 하나님을 붙들게 된다. 거울앞에 서면, 내면이 비친다. 오늘도 주일말씀을 통해, 깊은 영혼의 내면이 비쳐짐으로, 새롭게 씻음을 당한다. 성령의 은혜다. 듣는 마음을 주셔서, 주님과 함께 오늘 하루가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