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읽기와 성경해석과 성경적용
중세의 암흑은 지성을 폭발시켰다. 신본주의로 점철된 신학의 추락은 인문학을 태동시켰다. 과연, 합리적 의심에 따라,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난해한 구절들이 많다. 우리는 그때마다 사도행전 8장의 그 내시가 된다. 이사야서 53장 7~8을 읽고 있던 그 내시는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을 수레에 태운다. 그가 빌립이다. 꼭,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를 보는 듯 하다. 예수님은 다른 모양으로 두 제자에게 나타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면서 성경의 깊은 비밀을 알려줬다. 이제, 예수님은 빌립의 모양으로 내시를 찾아간다. 그처럼,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지혜로운 다섯 처녀가 되어야한다. 성경을 읽고, 궁금해한 내시는 빌립을 통해 나타난 성령의 방문을 영접했다. 그리고, 그는 그날 즉시 물세례를 받았다. 수레를 타고 가다가 우물을 만났던지, 혹은 졸졸졸 흐르는 개울을 만났던지, 그곳을 발견하고, 시냇가로 내려가서 세례식을 진행했다. 그리고 각자 갈 길을 갔다. 이것이 곧 전도(傳道)다. 성경을 보는 눈을 열어준 것이 전도(傳道)다. 바울은 이러한 전도를 “중매”라고 정의했다. 남편이신 예수님께 정결한 처녀인 성도를 중매하는 것이 ‘전도의 특명’이다. 곧, 창세기 24장 늙은 종 엘리에셀의 사명이다. 아브라함이 엘리에셀을 하란땅에 보낼 때, ‘세례요한의 사명자’처럼 보낸다.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창24:7)
아브라함은 너무 늙어서 늙은 종 엘리에셀을 보냈고, 하나님은 엘리에셀보다 앞서서 천사를 보내서 ‘이삭의 아내’를 택정하신다. 아브라함의 예언은 그때 이뤄졌다. 세례요한의 역할은 곧 엘리에셀과 같다. 그런데, 각종 이단종교는 “엘리에셀”의 직분을 망각하고, 스스로 이삭의 아내를 자신의 것으로 취한다. 옳지 않다. 남편은 오직 예수님 외에 없다. 이것을 명심해야한다.
왜 성경을 읽는가? 성경을 통해 약속한 구원을 받기 위함이다. 구원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다.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자녀는 ‘이삭’이다. 그 외는 육체의 자식들이다. 이스마엘, 시므란, 욕산, 므단, 미디안, 이스박, 수아는 육체의 자식들이다. 아브라함은 8명의 아들을 낳았고, 그 중에서 둘째인 이삭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낳았다. 그 이삭이 예수님의 표상이다.
빌립에게 내시가 물었다.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르침이냐. 자기를 가르킴이냐. 타인을 가르킴이냐”
이러한 질문을 받을 때, 답은 명확하다. 그는 예수님이다. 그런데, 이단종교는 “그 예언은 선지자 자신이 아니다. 예수님인데, 그 예수님도 근본이 아니다. 지금 시대에 나타난 새로운 그리스도다”라고 설명한다. 속지말라!! 답은 예수님이다. 빌립은 성령에 따라 내시를 만났고, 그때 빌립은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했다. 예수님을 가르치는 것이 곧 ‘성경해석’이다.
성경읽기, 성경해석, 성경적용은 “자기를 가르킴이냐, 타인을 가르킴이냐”로 정의된다. 성경을 읽고, 성경을 배우고, 성경을 탐구한 후에 자신의 마음이 누구를 향하는가? 예수님을 향하고, 성령을 사모하면, 그 성경공부는 올바르다. 반면, 성경공부를 가르키는 자를 향하게 하면, 그것은 틀렸다. 성경공부를 하고서, 세례를 받은 내시와 세례를 준 빌립은 각자 자기 길로 갔다.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사도행전8:39)
성경공부를 시키면서,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그런 성경교사는 회개해야한다. 이단종교가 특히 그렇다. 그들은 성경공부를 빌미삼아, 예수님의 양들을 가로챈다. 남편은 오직 예수님이며,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감찰하신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새롭게 옮긴 교회에서 예수님을 남편으로 삼는 성경공부를 배웠다. 내게 가장 큰 유익이며, 선물이다. 30년 동안 내 영혼은 돌짝밭, 길가밭, 가시밭과 같았으나, 1년만에 모든 손실이 회복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