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에게 아들 3명이 있었고, 노아에게도 아들이 3명 있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온 어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다고 했는데, 자세히 보면 아들이 3명같다. 독생자 예수님까지 포함하면, 하나님은 아들이 3명이다. 하늘에는 독생자 예수님, 땅에는 장자와 탕자다.
해당 비유는 누가복음 10장까지 연결된다. 10장에는 70문도 파송이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이스라엘 각지로 파송해서 병고치는 능력을 보이시며, 종교의 부흥운동을 펼쳤다. 어쩌면, 아마도, 예수님은 바리새파에 속했을 수도 있다.
혹자는 예수님이 에세네파에 속했다고 하지만, 누가는 예수님이 바리새파에 속해서 활동하고, 에세네파의 세례요한에게도 세례를 받은 것으로 묘사한다. 특정 종파를 구분하지 않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각 종파를 인정하면서 사셨던 것 같다.
70문도 파송 이후, 바리새파에서 ‘예수님의 존재’를 새롭게 해석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부의 기득권 세력은 새로운 인물의 등장을 싫어할 것이고, 트집을 잡기 위해서 바리새파에 속한 ‘반대자들’이 ‘안식일 범죄현장’을 노려서 예수님을 공격했는데, 정도가 심했다. 11장의 바리새인의 점심식사 초대에서 손을 씻지 않은 것도 그 중의 하나이며, 14장에서 바리새인의 지도자 집에서 수종병 환자를 고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바리새인들이 가장 잘못한 정책은 ‘독립운동’이다. 예수님은 그것을 근본적으로 반대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로마를 용서하고, 기도해주라”는 의미였는데, 노골적으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이념의 뇌관은 매우 민감해서 그렇다. 한국교회에서 누군가 “일본을 사랑하고, 예수안에서 새로운 미래를 바라보자”고 외친다면, 교회안에서 추방당할 수 있다. 그와 흡사하다.
바리새파는 시카리당을 몰래 후원했는데, AD30년 갈릴리에 근거를 둔 시카리당은 매우 작은 단체였다. 훗날 이 암살단이 기하급수적으로 숫자가 불어났고, AD60년에 동학혁명처럼 이스라엘의 주도권을 잡았고, 로마제국까지 활동영역을 넓히면서 AD63년을 기점으로 대제사장까지 암살하고, 열심당과 내전을 벌이면서 이스라엘은 멸망으로 급속히 기울었다. 예수님은 40년을 내다보면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바리새파는 로마를 미워하는 증오심이 결국 형제까지 죽이는 살인마로 만들었다. 가인처럼!!
15장에 나오는 ‘세리와 죄인들’은 바리새파가 보는 죄인들로서, 민족을 팔아넘긴 반역자들을 뜻한다. 곧 친로마 앞잡이들이다. 친일파 인사들이다. 민주당에 속한 국회의원이 친일파로 활동하는 대표적인 사람들과 식사를 한다면, 언론에 대서특필될 것이다.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는 그러한 자리였다. 아마도 세리 마태의 역할이 매우 컸던 것 같다.
예수님은 ‘친로마 사람들’과 ‘바리새인들’을 앞에 두고서, ‘두 아들을 둔 어떤 아버지’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곧, 로마와 이스라엘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께는 이스라엘도 아들이고, 이방도 아들이었다. 이방에 속한 아들들은 세상에 빠진 아들이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이 땅에 내려와, 탕자를 아버지께 돌이키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고, 예수님은 12사도와 70문도를 이스라엘에 보내서, 탕자들을 불렀다. 무덤에서 부활하신 후에는 사마리아와 로마까지 복음의 지경을 넓혔다.
탕자도, 장자도 모두 아버지의 아들이다. 죄가 많든, 적든,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 아버지의 마음에 들어가는 아들이 되어야한다. 등잔밑이 어둡다고, 아버지를 위해서 살았던 장자는 같은 집에 살면서도 아버지의 마음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반면, 탕자는 창녀와 놀아나고, 방탕했던 삶을 살아가 극적으로 돌이켜, 죄의 고통이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했다. 인생, 결국 아버지의 방문을 여는 것이다. 오늘은 주일, 하늘 아버지께 나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