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는 곧 “예수님”이다. 그런데, 어떤 종교는 “십자가는 뜻이 아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려고 낳겠느냐. 죽이려고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낸 것이 아니다. 믿지 않아서 죽였고, 시대가 기울어져 뜻이 바뀐 것이다”라고 해석한다. 오!! 그럴 듯 하다. 그러나, 복음이 아니다. 주님은 죽기위해 이 땅에 오셨다. ‘죽기위해’는 곧 ‘살리기위해’다. 주님은 이 땅에 백성을 살리기 위해 기습적으로 상륙하신 것이다. 솔직히, 모든 사람들은 “죽기위해” 태어났다. 죽음은 곧 인생의 마침표다. 어찌 이것을 부인하리요!! 죽지 않으려고 좀 더 살아봤자, 쥐꼬리만큼 더 살 뿐이다.
1C 바리새인들은 구두 기억법으로 성경해석을 암기했다고 한다. ‘구두 토라’로 불리는데, 예수님도 이러한 구두 암기법으로 제자들을 양성했고, 베드로와 요한과 마태가 모두 포함된다. 특히, 4명의 제자는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이었고, 마태는 뒤늦게 합류한 제자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 사건 이후, “십자가 교육”을 제자 공동체에 했다. 복음서는 3번째 교육을 했다고 적고 있다. 이것은 대속적 그리스도에 대한 제자교육으로, 분명 구두 기억법으로 당시 교육은 전달되었을 것이다. 죽었다가 3일만에 살아날 것이라는 주님의 예언은 “사명의 본질”이었다.
요한복음은 더 명확하다. 사도 요한은 세례요한의 직속 제자였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증거했다. 어린양은 바로 유월절 어린양과 이삭번제의 어린양이다. 모두 ‘대속적 그리스도’이다. 어찌, 주님의 사역이 중간에 변경됐다고 할 수 있는가? 주님은 성육신하기 전부터 이 땅에 대속적 그리스도로 오시려고 준비하셨다. 이삭 번제 사건에서 하나님이 준비하신다고 했다. 하나님은 이미 준비하셨고, 어린양이 이삭을 대신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2천년전에 그렇게 성육신하셨고, 십자가에서 대속적 희생을 당하셨고, 3일후 무덤에서 부활하셨다. 이삭번제가 곧 십자가 번제의 복선이었던 것이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흘림이 십자가 번제의 암시였던 것이다. 이렇게 절묘한 일치는 말씀으로 인봉된 주님의 십자가 사명인데, 어리석은 자들은 말씀속에 감춰진 십자가의 보물을 알지 못한다. 영혼의 소경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