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4장에는 독특하고 섬뜻한 비유가 나온다. 창세기에 하갈과 사라가 등장하는데, 각각 이스마엘과 이삭을 낳았다. 이삭이 곧 이스라엘이 되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두 아들은 비유다”라고 정의하면서, 하갈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이고, 사라는 약속을 따른 성령으로 해석한다. 사라는 약속으로 이삭을 낳았고, 하갈은 육체로 이스마엘을 낳았다. 바울의 해석으로, 이삭의 후손인 유대인이 하갈의 족속이 된 것이다. 해석이 얼마나 무섭고, 섬뜻한지,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했던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바울은 ‘해석’으로 전통을 뒤집었다. 바울은 예수를 만난 후, 성경해석에 있어서 성령으로 충만했고, 십자가 신학이 접목되면서 자유의 날개를 달았다. 아멘!!
주님은 성도가 묶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종교제도에 묶이는 것은 구원의 참된 방법이 아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을 때, 주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고 했지, 종교제도에 묶이라고 하지 않았다. 사마리아 여인이 제시한 종교제도는 가지 말라고 했다. 종교제도는 필요하지만, 그러한 제도속에 영혼을 결박하면 안된다. 종교제도의 틀속에서 ‘성령의 자유함’으로 주님을 만나야한다. 성령은 우리의 어머니로서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다. 위에 있는 성령으로 성도는 살아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