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내가 키우는 달팽이 두 마리는 서로 친하지 않았다. 내가 둘을 달팽이로 인식하여도 각각의 달팽이는 서로 인식하지 못한다. 달팽이는 그저 더듬이로 느끼는 것으로 반응할 뿐이다. 볼 수 없으니 서로 느껴짐을 악수할 수도 없고, 더듬더듬 서로 오랫동안 느낄 수도 없다. 큰 달팽이 위에 작은 달팽이를 겹쳐서 올려 놓아도 별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가 오늘은 큰 나뭇잎 위에다 두 마리를 모두 올려놓고서 오랫동안 그곳에 있게 했다. 옥상에 벌을 주는 것과 같다. 큰 달팽이도 한동안 정지하였고, 작은 달팽이도 그곳에 꼼짝하지 않았다. 그리고 집에 나서기 전에 나뭇잎위에 있는 상추잎을 달팽이와 함께 그대로 옮겨서 화분의 흙더미로 내려 놓았다. 밖에 외출했다가 돌아와서 상추잎을 들어보니 웬걸 둘이 벌써 친숙해졌다. 새근새근 잠이 든 모습이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의 모습이다. 어찌나 서로 닮았던지, 친밀감은 이처럼 어려운 일을 함께 견디면서 생기는 것 같다. 같은 상추잎을 이불처럼 덮고서 한참동안 동고동락하니, 두 달팽이는 금새 친밀감을 형성했다.
친밀감(親密感)은 밀착해서 친해진다는 뜻과 비밀을 공유함으로 친해진다는 뜻이 있다. 친밀감은 곧 정보를 함께 공유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구세주로 이 땅에 왔으나 베드로와 제자들과 주로 다니면서 그들과 친밀감을 형성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도 대화를 주고 받았으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듣는대로 트집을 잡고 말꼬리를 흔들어서 친밀감을 형성할 수가 없었다. 동고동락했던 베드로는 훗날 예수님의 길을 따라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냈다. 죽음을 앞둔 십자가앞에서 청년시절에는 도망쳤으나 노년의 세월에는 예수님의 권면으로 묵묵히 십자가에 메달려 예수님과 약속을 이행했다. 친밀감은 곧 함께 하는 것이다.
친(親)은 볼 견(見)이 들어있다. 친하려면 자주 봐야한다. 안 보고 친해질 수는 없다. 인터넷이 아무리 발달해도 서로 얼굴을 보여주고, 마음을 보여주고, 보고 있는 것을 보여줄 때 비로소 친해진다. 부모와 자식이 친한 이유는 서로 자주 보기 때문이다. 본다는 것은 얼굴을 보는 것과 마음을 보는 것과 행동을 보는 것 등등 다양한다. 서로 상(相)도 눈으로 나무를 본다는 뜻인데, 사람과 사람이 마주본다는 뜻으로 변형되었다. 이처럼 본다는 것은 ‘서로’의 의미를 갖고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본다면, 서로가 마주보게 된다. 마주보는 그 관계가 바로 친밀감의 기회이다. 눈과 눈이 마주치는 것, 마음과 마음이 마주치는 것, 모두 서로 보는 것이다.
달팽이를 보면서, 실력껏 살 때까지 살아갈 두 달팽이가 이제 정겹게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작은 달팽이가 큰 달팽이게 몸을 기대고, 큰 달팽이는 작은 달팽이를 몸에 품고서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가니, 화분에 평안한 저녁이 찾아 들었다. 상추잎을 잠시 들었다가 다시 담요를 덮어줬다. 둘은 오늘 밤, 오붓하게 잠이 들 것 같다. 하룻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고, 생사(生死)를 오고가는 위험천만한 사건속에서 살아남은 작은 달팽이가 새근새근 잠든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입가에 번진다. 달팽이가 알든 모르든 나의 달팽이로 인해서 오늘은 무척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