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혼자 살아도 의사소통을 해야한다. 집에 하루종일 홀로 있어도, 의사소통을 한다. 핸드폰이 없더라도, 인터넷이 되지 않더라도, 인간은 자기 생각속에서 끊임없이 의사소통을 한다. 뭔가를 스스로 표현한다. 혼자 있어도 혼잣말을 하는데, 하물며 둘이 있으면 오죽하랴. 산책하면서 꽃을 보고 느끼는 감정표현, 그것도 의사소통이다. 애완견을 키우는 이유도 사실은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다. 인간은 깨어있는 시간 90%가 의사소통이며, 50%는 말로서 표현한다.
이혼, 다툼, 해고, 왕따, 멱살잡기, 폭행 등등 크고 작은 사회문제는 결국 의사소통의 마찰 때문에 발생한다. 의사소통은 과연 뭘까?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의사소통을 잘하는 것일까? 말로 이겨먹는 사람이 의사소통의 달인일까? 인간이라면, 깊은 고민을 해야할 문제다.
의사소통은 쌍방통행인데, 왕권체제와 가부장적 제도에 익숙한 한국인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각각 구분되어 상하전달식 일방통행으로 대화할 때가 많다. 서로 협력해서 만들어가는 언어 게임으로서 대화를 즐길 수 있다면, 행복한 인생이다. 길이 막히면 짜증이 나는데, 소통이 막히면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의사소통(意思疏通)은 뭘까?
영어로 communication은 어원적으로 나누다, 함께하다, 분배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한자적 의미로, 의사소통은 ‘의사’가 물흐르듯 오고가는 행위다. 의사(意思)는 생각과 감정이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눌 때, 자기 생각만 일방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정보 전달자에 불과하다. 의사소통은 함께 나누는 과정이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는 언어 덕분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정보를 나누고, 협력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언어가 매개체 역할을 한다. 의사소통은 언어를 중심으로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는 과정이다.
의사소통을 사람들은 자주 오해한다. 택배를 주문하면 물건이 도착하듯, 자신이 말한 내용이 상대방에게 그대로 전달됐다고 믿는다. 전혀 아니다. 내가 고려거란전쟁을 볼 때, 나는 그 드라마에서 흥화진 전투를 승리로 이끈 장수 양규, 고슴도치처럼 화살을 맞고 죽은 마지막 장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봤다. 드라마 작가의 의도와 전혀 상관없는 내용인데, 나는 그렇게 보였다. 이렇게 메시지는 왜곡된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본다.
작가가 책을 쓰면, 그 책은 이제 작가의 것이 아니고, 독자의 것이다. 작가는 책을 독자에게 시집 보낸 것이다. 이제 독자는 책을 사랑하며 독자의 시작을 재해석한다. 독자가 책의 새로운 작가다. 이것이 의사소통의 과정이다. 정보의 물건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소통에 참여한 사람이 함께 그 정보를 빚어가는 것이다. A와 B 사이에 소음만 없다면 의사소통이 매끄럽게 진행될 것으로 간주하면 대단한 착각이다. A와 B 사이에 편견의 유리벽이 없더라도, 의사소통은 절대 물건처럼 이동될 수 없다. 오히려 물처럼 이동한다. A는 둥근 유리컵, B는 각진 사발이다. A가 B에게 물을 건넨 순간, B는 물을 각지게 만든다. B의 사고방식, 경험, 가치관에 의해 메시지는 새롭게 해석된다. 이것을 이해하고 인정해야 의사소통에 동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