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나는 주일에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를 드렸다. 예배(禮拜)는 예절을 갖춰서 절을 올리는 것이다. 일주일을 앞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명절 때 고향을 찾듯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주일예배는 늘, 찬양과 말씀으로 이뤄진다. 성가대 찬양도 감동적이었다. 오늘 말씀 주제는 하나님과 소통하는 방법에 대해서다.
요즘, 정치세계를 보면 여당과 야당,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지자체별 님비 현상이 극적으로 치달으면서 소통의 부재를 목도한다. 소통(疏通)은 서로 통하는 것이며, 통(通)은 길을 따라 걷는 것이다. 마을에서 집과 집이 연결되는 것은 바로 골목길이다. 통(通)은 마을속에 있는 골목길이다. 골목길이 없다면 집에서 집으로 다닐 수가 없다. 마을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집과 함께 ‘길’이 만들어져야한다. 여기서 ‘길’은 공용이며, 양보이며, 배려이다. 소통이 없는 곳은 길이 없는 곳과 같다. 바로 ‘산’이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소통하는데는 ‘언어’가 필수지만, 진정한 소통은 언어로 이뤄지지 않는다. 말들이 난무한 토론장에서 과연 소통이 이뤄질까? 우리는 모두 한국어를 사용하는데, 왜 불통의 시대를 살아갈까? 이것은 진정한 소통이 언어의 도구에 있지 않음을 말해준다. 말이 통한다고 마음까지 통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가족끼리도 분명 말이 통하는데, 맘은 통하지 않는다. 자식과 부모의 불통은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감정언어’의 불통문제인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면서 서로를 향해 불신의 벽만 높아지는 것이다.
마을에서도 아무리 ‘길’이 있다고 해도, 집과 집의 벽이 높아지고, 대문이 굳게 닫혀있고, 집을 나설 때는 차를 가지고 나간다면, 평창동의 집들처럼 마을안의 소통은 없게 된다. 평창동의 집들은 정말로 대궐처럼 높다. 그곳 주민들은 서로 이해하면 살 이유가 없다. 대화보다는 자신들의 집을 유지하기 급급하다. 그처럼, 길은 서로 통할 때만 의미가 있다.
진정한 소통은 언어를 초월한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반드시 마음까지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은 마음으로 통하는 심정언어를 의미한다. 말하지 않아도 말한 것이 느껴지는 때가 있고, 아무리 말을 해도 서로 통하지 않을 때가 있다. 이것은 소통의 핵심이 말보다 감정에 있음을 말하며, 그것은 곧 서로가 서로를 품는 사랑의 언어와 상관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이러한데, 하물며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이랴!!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는 신(神)이라고 했다. 신(神)은 곧 유형의 존재체가 아니고 무형의 존재체이다. 형체가 없지만 분명 존재한다. 종교언어로는 영혼(靈魂)이라고 부른다. 영혼은 영과 혼의 합성어이며, 영체와 혼체가 바로 영혼이다. 혼체는 혼백으로 이뤄져 있다. 도덕시간에 배웠던 그 ‘지정의’가 바로 혼체이며, 생각의 실상체이다. 영은 혼체보다 더 높고, 깊은 존재체로서 육체가 죽게 되면 영계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신(神)은 곧 영체를 말한다.
육체와 영체가 서로 소통하는 방법이 있다. 이것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소통하는 것처럼 분명 다르지만 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야당과 여당도 사실 서로 다툴 것만 아니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도 서로 소통하기 위해서 나뉜 것인데, 늘상 다투기만 하다가 세월이 간다. 통해야 모든 존재는 움직일 수 있다. 뇌와 지체가 통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식물인간이다. 그처럼 연결된 지체와 핵심이 통하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것과 같다. 그 무엇이든 통하지 못하면 관계성이 단절되면서 죽은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인간과 하나님이 통하는 방법은 통하지 못한 사례를 통해서 유추할 수 있다. 아담과 하와는 창세기에서 하나님과 소통했다. 그런데, 처음에는 소통했다가 나중에 불통한 사건이 등장한다. 에덴동산 중앙의 나무에 손대지 말고 따먹지 말라는 말씀을 어기면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소통이 끊어졌다. 이 사건은 매주 중요하다. 곧,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을 때는 그 행위로 하나님과 소통했으나, 말씀을 범하여 범죄하면서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고, 소통이 끊어진 것이다. 인간의 행위 자체가 언어가 되어서 하나님께 전달된 것이다.
가령, 교회에서 “이번주 떡을 준비해서 성도들에게 나눠줍시다”라고 의논했다고 하면, 그것은 의논에 불과하다. 누군가 돈을 지출해서, 떡을 만들어야만, 주일날 예배가 모두 마친 다음에 떡을 전달할 수가 있다. 떡을 만들자는 논의는 말과 같고, 그 논의를 실천한 것은 말을 행동한 것과 같다. 말만 하고, 그 말을 실천하지 못하였다면 떡은 없는 것다. 떡의 존재는 행동으로 준비된다.
실제로 나는 오늘 떡을 받았다. 지도자 모임에서 떡을 준비한 것이 분명하다. 의논하고 실천했으니까, 떡을 직접 나눠준 것이다. 이처럼 나는 오늘 떡과 같은 말씀을 받았고, 그 말씀을 노트에 기록하고, 나의 마음판에 기록하였다. 사랑의 말씀과 지혜의 말씀과 생활의 말씀들을 받고서, 이제는 실천의 과정만이 남아있다. 실천하면 그때 비로서 하나님의 고막에 행위의 말이 들려진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인간과 하나님의 소통관계인가?
하나님은 교회에서 단상을 통해 말씀하신다. 단상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말씀은 참으로 오묘하고 달콤하다. 이 말씀으로 나는 이번주도 살아갈 것이며, 내가 영원히 살아갈 이 지구행성의 생활속에서 더 나은 내일을 향해 오늘의 변화를 모색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소통은 반드시 ‘행동의 언어’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오늘부터 집에 가서 내 삶을 다시 점검하고, 세탁기를 돌려서 옷도 빨고, 내 성격도 교정하고, 다양하게 추구할 것을 행해야겠다. 떡을 준비했으니, 떡을 나눠줄 수 있듯이 행위의 떡을 만드는 삶이 되어야겠다.
노아도 마찬가지다. 노아는 아담이후 1600년만에 출현한 인물인데,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배를 만들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만약 노아가 배를 만들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노아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이처럼 구체적이며, 생활속에서 그 열매로 형상화된다. 책을 쓰는 일, 공부하는 일, 문법을 배우는 일, 등등 내가 하나님의 감동을 따라 행해야할 인생의 책무는 행할 때 그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내 삶에 채찍의 책임을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