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증과 불편은 몸의 갈등관계다. 몸은 조직으로 구성된다. 우리가 생물시간에 배웠듯이, 순환계와 근육계와 신경계와 소화계 등등 다양한 조직들이 상호 연결되어서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것인 인체다. 인체는 관절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 근육과 인대가 잡아당기는 수축운동을 한다. 엄청난 부속품들로 결합되어 있어서 마찰은 불가피하다. 통증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글을 쓰는 지금, 나의 모든 관절 중에서 10곳은 약간 아프고, 내가 알지 못하는 아픈 곳이 있을 것이다. 잠재된 아픈 곳, 드러난 아픈 곳 등등이 존재한다. 통증이 발생하면, 일단 사람들은 ‘병든 곳’으로 평가한다. 뼈가 골절되거나, 교통사고가 나서 몸이 부서진 것이라면 당장 치료를 해야하지만, 몸이 쑤시거나, 발목이 뻐근하거나, 옆구리가 계속 아파오는 것은 그 원인을 알 수가 없다. 이러한 몸의 갈등을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통증이 발생하면, 반드시 그 통증의 근본을 따져봐야한다. 자신이 자신의 통증을 알아내야지, 의사에게 그 책임을 맡길 수는 없다. 만성통증도 결국 사소한 것에서 발생한다. 오늘 내가 배변에서 설사를 했다면, 십중팔구 어제 먹었던 음식이 문제가 있었거나, 혹은 과도한 스트레스로 장운동이 꼬였거나, 둘 중에 하나다. 그것을 따지지 않으면 건강을 관리할 수가 없다. 나의 오른쪽 옆구리, 장요근이 아직 아프다. 그 원인은 지난 토요일에 무리한 스트레칭을 해서다. 스트레칭 중에서 균형잡기 스트레칭은 무리가 안되었는데, 한손으로 집고서 다른 손은 위로 올리는 스트레칭이 엄청나게 무리가 되었다. 나의 우측 장요근 경직은 그 스트레칭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분석한다. 내가 그날 배웠던 모든 동작을 다시 재반복을 했는데, 내가 아픈 부위에 직접 영향을 줬던 동작을 찾아낸 것이다. 이것이 통증의 원인을 찾아내는 분석법이다.
“옆구리 장요근 통증은 어떻게 해결했나요?”
독자가 물을 수 있는 궁금증이다. 답은 하나다.
“그냥 쉼!!”
나는 아무 것도 안했다. 그냥 쉬었다. 아프니까, 쉬었다. 힘드니까, 쉬는 것과 같다. 통증과 불편은 쉬라는 청신호다. 얼마나 좋은가? 힘들면, 쉬는 것이다. 그 동안에 그 힘든 것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찬찬히 분석해야한다. 스트레칭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면, 나는 그 원인을 반드시 찾아내야한다. 찾아내지 못하면 생활습관이 지속적으로 나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통증과 불편은 몸에 변화가 발생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고, 그것이 미세한 병원체인지, 혹은 외부의 압력인지, 혹은 그 어떤 것인지 사람이 지각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는 면역 시스템의 방법이다. 통증을 간과하면, 더 큰 통증으로 발전하고, 결국 사람이 죽는 병에 걸리게 된다. 만사가 그렇다.
누군가 나를 향해 빨간 신호등의 경고를 했다면, 그것은 빨간 신호등을 탓할 것이 아니고, 횡단보도를 하고 있는 자신의 행위를 멈추라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본인이 얼른 깨닫고 몸가짐, 마음가짐을 새롭게 해야한다. 그 한계를 벗어나면, 힘줄은 끊어진다.
역기 선수가 “나는 불가능이 없다”면서 근육의 힘과 정신력으로 역기를 들었다. 그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금메달을 따야겠다는 불굴의 정신으로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근육과 힘줄과 인대와 관절은 각각 다른 기관이라서, 근육과 정신력이 역기를 들었어도, 인대에 있는 자동장치는 힘줄을 풀어버린다. 이것은 반사신경으로 무의식신경에 속한다. 근육은 버텼으나, 인대가 버티지 못하니, 스스로 척추를 움직여서 근육을 이완시켜서 역기를 놓게 만든다. 이것은 반사신경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생은 자신이 원하는 일과 원치 않은 일이 겹쳐서 진행되며, 팔을 펼 때는 신근(伸筋)과 굴근(屈筋)이 함께 연결되어서 작동한다. ‘금지와 허락’은 자동차의 가속기와 브레이크처럼 함께 존재해야 자신의 생명을 존재시킬 수 있다.
통증은 ‘멈추라’는 사랑의 메시지다. 그 통증을 거절하면, 그때는 더 큰 통증이 몰려온다. 통증은 몸을 보호하는 최첨단 면역 시스템이다. 통증처럼 자신을 보호하려면, 주변에 자신을 보여주는 정직의 빨간불이 하나에서 둘 정도는 있어야한다. 그래야 영혼의 건강이 온전히 보호될 수 있다.